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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지역문화 인력(人力)은 어떻게 인력(引力)이 되는가?
김정이 | 비커밍콜렉티브 대표
누가 누구를 '양성'하는가: 위계의 언어를 넘어서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인력양성’이란 단어에는 위계의 구조가 은폐되어 있다. ‘양성’이란 단어는 근본적으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가르치고 길러내는 일방향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누군가가 설정한 어떤 기준에 아직 미처 도달하지 못한 존재를 외부의 전문성과 권위를 지닌 누군가가 끌어올려야 한다는 전통적인 계몽주의적 교육관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사람은 길러지는가? 길러질 수 있는가?

지역에서 활동하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프로그램을 ‘수료’하면, 그 자체로 기준에 부합하는 유의미한 기획 인력이 되는가?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성장 서사로, 대상자 개개인의 삶의 맥락, 내면의 감각, 관계 속에서 축적되어 온 암묵지, 그리고 존재의 고유한 리듬은 지워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인력양성’ 담론이 실제로는 대상자의 시선과 주체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흔히 ‘역량 개발’, ‘전문성 함양’이라는 명목 하에 지역의 활동가나 문화주체를 단일한 목표점, 즉 시스템이 요구하는 기능적 인력으로 수렴시키려 한다. 우리는 타인을 일방적으로 ‘양성’할 수 없다. 이는 존재에 대한 폭력이며, 관계에 대한 오만일 수 있다.

특히 지역문화와 같이 고유한 정서와 경험, 역사와 장소성이 켜켜이 쌓여 있는 장에서라면, ‘양성’이라는 개념은 더욱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지역의 문화주체는 단지 ‘교육받는 자’가 아니라, 이미 자기만의 언어와 실천, 해석의 틀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들을 수직적 대상화로만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고유한 지식, 삶의 논리,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의 실천적 감각을 오히려 무력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작은 ‘인력양성’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시대와 현장을 설명해주지 못하는 언어이며, 새로운 문화적 실천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제도적이고 기능주의적이다. 이 용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새로운 단어의 조건은 누군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잠재성과 관계의 에너지에 주목하는 것이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함께 ‘발견하고 여는’ 과정이라는 의미가 담겨야 한다.

‘인력(人力)’은 ‘인력(引力)’되는가

경기도 문화원 편집위원 측에서 제시해준 “인력(人力)은 인력(引力)되는가?”라는 발제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땐, 일종의 언어 유희처럼 느껴져 가볍게 넘겼으나, 여러 번 곱씹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 그 안에 담긴 은유적 잠재력과 개념적 전환의 가능성은 오히려 ‘인력양성(人力養成)’이라는 관료적 언어를 전복할 대안적 상징으로서의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력(人力)’은 말 그대로 사람의 힘을 뜻하지만, 사람의 힘은 속한 환경과 관계, 감정, 실천의 장 속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인력(引力)’이라는 개념이 은유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즉, ‘인력(引力)’은 지역과 정서적·실천적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 끌어당기는 힘을 생성하는 주체의 의미를 담아낸다. 마치 지구의 중력이 자체의 질량과 존재의 중력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사물을 끌어당기듯, 지역이 누군가의 삶의 중력장이 될 수 있다면, 사람은 그곳에 머물고, 뿌리내리며, 작동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부의 개입이나 동원이 아니라, 내부의 감응과 자발성이다. 이 은유는 ‘되기(becoming)’의 존재론과 맞닿아 있다. 즉, 인력이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정체성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자신을 구성해가고,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재조정하며, 경험과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생성되는 과정 그 자체를 뜻한다. ‘되기’란 고정된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잠재성의 열림과 그 흐름 속에서의 감응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인력’은 ‘끌리는 존재’, ‘머무르는 존재’, ‘작동하는 존재’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중력장을 형성하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지역의 인재가 떠나는 문제를 ‘정책’과 ‘지원책’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물리적 조건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 지역이 삶의 감각과 정서, 실천을 수용하고 공명할 수 있는 장소가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사람이 지역에 머무르고 싶어지는 이유,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는 이유는 ‘소속’이 아니라 ‘끌림’이다. 그런 점에서 ‘인력(人力)’은 ‘인력(引力)’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가 지역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중심력을 발휘하고, 새로운 생태의 중심점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인재의 이미지다. 따라서 인력양성이라는 낡은 언어를 고집하기보다는, 이제는 ‘인력되기’, 혹은 ‘관계 중력 형성’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역이라는 공동체가 타인을 수용하고 끌어당기는 장소가 되고자 할 때 가능하며, 교육이란 그 중력장을 함께 설계하고 실험하는 감응적 여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언어의 치환을 넘어, 정책과 교육, 문화 기획 전반의 패러다임을 재구성하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문화적 실천에의 참가

기존의 ‘인력양성’ 프로그램은 대체로 지식이나 기능을 전달하는 강의 중심의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이는 효율성과 표준화를 강조하는 제도 중심 교육 시스템의 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강사가 제공하는 정보를 수강자가 수용하는 일방향적 전달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인력’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처해 있는 지역의 문화적·사회적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력이란 단지 정보를 전달받는 수동적인 학습자가 아니라, 지역이라는 살아 있는 장(field) 안에서 실천적으로 존재하고, 감응하고, 개입하는 역동적인 문화주체이기 때문이다. 즉, ‘인력’이란 외부로부터 조립되거나 이식되는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장소성과 시간성 속에서 관계를 맺고, 맥락을 해석하며, 자신의 경험을 다시 쓰는 존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력이 되어간다는 것은 곧, 정적인 '형성'이 아니라, 능동적인 ‘되기(becoming)’이며, 이는 참여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Lave와 Wenger(1991)의 실천공동체(Community of Practice) 이론에 따르면, 학습은 개인 내부에서 발생하는 내면적 변화나 정보 축적의 과정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실천의 장에 들어가는 참여(participation)의 과정이다. 즉, 학습은 공동체 내부의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곧 정체성과 실천의 재구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각은 교육을 단지 콘텐츠의 소비나 역량의 주입으로 보는 기존 ‘인력양성’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든다.

‘인력’이 되어간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하나의 문화적 장면 속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찾아가고, 자신이 가진 감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관계 맺고, 의미를 생산해내는 과정을 뜻한다. 따라서 인력이 되는 여정은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나 표준화된 커리큘럼의 이수, 혹은 인증서의 취득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처한 삶의 현실과 공동체의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를 스스로 재구성하고 실험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력’은 시스템이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형성되고 구성되어가는 존재다. 교육은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장이 아니라, 실천과 성찰, 그리고 관계의 윤리 속에서 주체가 탄생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인력양성’ 담론을 넘어설 수 있는 실천적 전환의 관점이며, 지역문화교육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학습의 윤리이자 정치학이다.

고립을 넘어 ‘되기’의 교육으로

그렇다면 왜 지금, 이러한 교육의 재구성이 필요한가? 지역의 문화인력이 처한 현실은 종종 고립이다. 이 고립은 단지 물리적으로 혼자 있다는 상태가 아니라, 세계와의 단절 상태, 다시 말해 관계와 실천에서 벗어나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무력의 상태를 의미한다. 한나 아렌트는 고립을 “행위할 수 없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고립이 단지 개인적 외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전체주의적 상황으로의 이행 가능성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을 더욱 구체적으로 던져야 한다. 어쩌면 전체주의는 국가의 억압적 제도나 강압적 권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먼저 조용히 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각자의 고립이 구조화되고, 관계 없는 일상과 타자 없는 실천이 지속되며, 사유와 표현이 사라지는 지역사회 속에서 이미 전체주의적 질서의 형태가 자라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문화정책의 부재나 행정 시스템의 경직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립된 사람들 사이에 연결이 부재한 상황 자체가, 삶의 정치성을 서서히 상실시키고 있다는 데 더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고립 상태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들과의 실천적 연결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역이라는 삶의 장 안에서 관계의 복원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은 바로 이러한 고립을 넘어서는 문화적 연결 장치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정보를 주입하거나 기능을 전수하는 구조를 넘어서,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불러내고, 응답하며, 공동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의 장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사람은 더 이상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내부에서 중력장을 생성하는 실천의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제는 ‘인력양성’이라는 위계적이고 산업화된 언어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이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 사람의 문화주체는 외부에서 길러지는 대상이 아니라, 지역이라는 세계 안에서 관계를 맺고, 실천하고, 질문하며 살아가는 ‘되기’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는 단지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중력을 만들어내는 인력(引力)의 주체가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지역문화교육에서 새로운 언어를 요청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바뀔 때, 우리가 설계하는 교육의 윤리와 정치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인력양성’이라는 도식적 언어에서 벗어나, ‘되기’와 ‘관계적 실천’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전환할 때, 지역은 더 이상 사람이 떠나는 곳이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장소가 될 수 있다. 경기도문화원연합회와 같은 문화 기관이 그 언어의 전환을 실천하는 첫 번째 실험장이 되어주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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