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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피어나는 삶, 피어나는 지역
고영직 | 문학평론가
타동사에서 자동사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행복’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행복한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좋은 삶에 진심이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개념을 통해 피어나는 삶(flourishing life)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원래 ‘다이몬(daimon)이 활성화된 상태’라는 뜻이다. 사람의 행복은 가능성과 더 충만한 삶을 찾아가는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타동사(他動詞)의 삶이 아니라 ‘자동사(自動詞)’의 삶을 살아갈 때 피어나는 삶이 가능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 자동사의 삶을 살며, 일상에서 피어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어쩌면 시스템의 인질이 되어 타동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지난 12.3 내란 이후 나와 우리가 확인했던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서서히 죽어가는(slow death)’ 빈사 상태에 처했다는 뼈아픈 자각이었다. 기대할 수 있는 내 일(job)과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확인한 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1월 자살자가 ‘1306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것을 보라.

대안이 없는가. 누군가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오게 만들 때에만 찾아온다”(C.더글러스 러미스)라고 한 말에서 작은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우리 몸의 건강한 상태란 작은 모세혈관이 튼튼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건강함 또한 일상 곳곳에서 작은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 안의 견고한 도덕률처럼 작동하는 ‘척도’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즉 ‘경제는 발전해야 한다’, ‘경제는 성장해야 한다’처럼 우리 안의 견고한 경제결정론에 대해 다른 관점의 전환과 행동이 필요하다.
경제학자 홍기빈은 『위기 이후의 경제철학』(2023)에서 그리스 에우다이모니아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우리 행동의 목적은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나의 좋은 삶”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여기의 지역문화의 상황에 빗대 말하자면, 피어나는 지역/로컬은 저마다 피어나는 삶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저마다 피어나는 삶이야말로 피어나는 로컬을 만드는 바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소토코토》 편집인 사시데 가즈마사(왼쪽)는 2거점 사고를 강조한다. ⓒ소토코토 홈페이지

도서관, 읽기보다 ‘잇기’가 중요하다

피어나는 삶과 피어나는 지역은 어떻게 가능한가. 소위 지역 소멸 위기가 거론되는 시절에 피어나는 삶과 피어나는 지역은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을 갖고 삶터를 책임지려는 재미있는 활동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 너무 심각한 얼굴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았던가.
2025년 9월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서 진행된 [지리산포럼](2025.9.25.-9.28)에 참석한 일본 로컬 잡지 《소토코토》의 사시데 가즈마사(指出一正) 편집장은 ‘2거점’ 사고와 더불어 ‘부드러운 인프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2거점 사고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현재 사는 ‘서울’과 살고 싶은 ‘지리산’을 언제나 항상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 같은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그는 현재 ‘도쿄의 나’는 《소토코토》 편집장이고 사람들에게 관계인구를 안내하는 역할이라고 한다면, ‘고베의 나’는 아이 아빠로서 학부모 노릇을 하는 몹시 낯가리는 이웃이라고 소개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가 부드러운 인프라 일곱 가지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그가 꼽은 부드러운 인프라 일곱 가지에는 커피, 와이파이, 동료, 서점, 브루어리(brewery, 맥주), 공유 오피스, 빵집 등이 포함된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인프라의 목록들이 반드시 중후장대한 인프라는 아니라는 사실이 퍽 신선하다.
물론 중후장대한 인프라가 필요할 수 있다. 나는 특히 지역에서 도서관이 갖는 위상과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2023년 6월 강원도 인제군에 개관한 인제기적의도서관은 세련된 건물 외양에 높은 천장을 자랑하는 건축물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영유아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책, 음악, 영화, 미디어아트, 동아리 활동, 문화교류 등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마음껏 즐기고 나누며 서로 배울 수 있는 복합문화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이른바 ‘독서실’ 같은 열람실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인제기적의도서관이 2025년 6월 기준 인구 31,005명인 인제군을 대표하는 명소로서 주민들에게 자부심과 긍지의 원천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역 도서관은 이제 책을 ‘읽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지역을 ‘잇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제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도서관이 전통적인 라이브러리의 역할을 넘어 이제 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도서관이라는 ‘라이프러리’(Life+Library)의 개념을 탑재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을 매개로 ‘지역 속으로’ 더욱 밀착하며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지역을 잇는 매개자로서 역할을 하는 도서관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수년 전에 본 프레더릭 와이즈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2018)가 떠오른다. 우리 시대 지역 도서관이 어떤 자기 비전을 갖고 자기 고유의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영화였다. 시민들의 피어나는 삶을 북돋는 도서관이 피어나는 지역을 리드(lead/read)한다는 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거대도시 뉴욕에는 중앙도서관을 비롯해 100여 개의 작은도서관이 뉴욕 곳곳에 자리해 있다. 영화를 보며 느낀 것은 뉴욕의 도서관들이 하는 일은 한마디로 ‘연결(connect)’이었다는 점이다. 『이기적인 유전자』(1976)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뉴욕도서관 강연에서 생물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공존을 강조하는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해야 연결될 수 있다. 그래야 공생할 줄 아는 인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가 탄생할 수 있다.
그렇다. 피어나는 삶은 피어나는 지역 안에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또 피어나는 지역은 시민들의 피어나는 삶을 일상적으로 북돋는다. 지역과 함께하며 지역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뿌리 내리려는 지역 도서관의 역할을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청주 초롱이네도서관, 용인느티나무도서관을 비롯해 은평구도서관마을, 전주 도서관 투어 같은 프로그램에서 참여자들이 서로 배우며 존중하는 공간의 ‘공기’를 느낀다. 극중 리처드 도킨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토니 모리슨의 말을 인용하며 “도서관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다”라고 한 말 또한 그런 의미였으리라.
이 말은 우리 시대 도서관이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모두를 위한 도서관’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지식의 공유성이고, 진짜 사회통합은 다양성의 존중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도서관의 역할과 기능이 읽기에서 ‘잇기’라고 단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하고, 낯설게 보게 하고, 다르게 보게 하는 힘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잇기의 힘은 결국 문화와 예술의 힘에서 나온다. 지역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갈수록 터무니없는 세상에서 ‘터무늬’를 찾아가려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영화 포스터

2025년 9월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진행된 현기영 작가와의 대화. ⓒ수원시평생학습관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 에우다이모니아의 이상은 저 그리스 시대 사람들의 염원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의 결말이 “두 사람은 잘먹고 잘살았다”라고 끝나는 데에는 잘 먹지도 잘 살지도 못했던 옛날 사람들의 간절한 비원이 옛이야기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도 과히 틀리지 않다.

하지만 우리 시대를 짓누르는 ‘불안’은 우리 영혼을 잠식하고 나아가 우리 삶을 좀먹는다. 불안이 지배하는 곳에 자유는 없다. 불안증폭사회를 넘어 개인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간에 내가 발딛고 사는 삶터 곳곳에 작은 희망의 근거 내지는 작은 아지트를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경우 2018년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소소한 변화를 이끌어내며, 해마다 국내외 및 전국 각지의 사회활동가들과 함께 [지리산포럼]을 꾸준히 연다. 2025년 11회째를 맞은 [지리산포럼]의 주제가 ‘민주주의, 함께 키우는 숲’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결국, 우리들이 스스로 만드는 작은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연결을 목격하는 일이 또 다른 연결을 상상하게 만들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열리는 [지리산포럼] 같은 소소한 공론장이 지역 곳곳에서 활발히 일어나야 한다. 그럴 때 피어나는 삶과 피어나는 지역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읍면(邑面) 지역 주민들을 수동적으로 대하려는 행정 대신에 주민 자치에 근거한 행정의 변화 또한 당연히 따라야 한다.

우리는 공허한 미래주의에 더 이상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중심과 변방 같은 것도 없다. 내가 사는 곳이 바로 ‘중심’이라는 생각의 전환과 작은 실천들이 요청된다. 그런 사람은 ‘자유롭지만 고독하게’(시인 이문재) 살 줄 아는 사람이고, 미래주의에 현혹되어 ‘세계로 나아감’이라는 우리 삶의 의미를 끝내 잃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시인이 “인간의 눈을 포기할 때/ 세계는 얼마나 광활한가/ 위험보다는 위대함에 가까운가”(박승민 시 「코로나 검사소」 마지막연)라고 썼듯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 간 경계를 넘어 기꺼이 함께하고 연대할 수 있는 호모 심비우스가 될 수 있다. 재일조선인 지식인 서경식(1951-2023) 선생이 생전에 강조한 ‘도서관적 시간’이란 그런 의미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때로는 고독하게, 때로는 우정을 나누며,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사는 것이 피어나는 삶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은 피어나는 지역으로 서서히 물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2025년 11회째를 맞은 [지리산포럼] 행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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