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지역문화원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많은 관계자가 "모두가 위기라고 말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단순히 재정이나 프로그램의 위기가 아니라, 문화재단, 전문 도서관 등 다양한 문화 주체가 등장한 지형 속에서 문화원 본연의 역할과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지역문화원의 새로운 좌표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웹진 《경기문화저널》 38호의 편집 방향이 제시하는 '에우다이모니아'는 단순한 행복을 넘어, 인간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며 '만개하는 삶' 또는 '피어나는 삶'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으로 정의하며, 행복이 소유나 상태가 아닌, 주체적인 삶의 실천 그 자체에 있음을 역설했다. 이 철학적 개념은 지역 문화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강력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 문화 활동의 목적이 단순히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행사, 축제 참여)에서 벗어나, 함께 잘 살아가는 삶을 공동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문화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하는 것(doing culture)'이다.
이러한 철학적 전환은 지역문화원의 향후 방향 설정에 대한 핵심 질문으로 이어진다. 만약 문화자치가 '피어나는 지역'을 만드는 것이라면, 이 공동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파트너는 누구이며, 그 작동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 지역문화원은 그 동안의 많은 경험과 토론을 통해 그 해답이 문화 기관과 시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설정하는 데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말해 기존의 공급자-수혜자 모델을 넘어, 깊고 구조적인 파트너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통적인 지역문화원 모델은 종종 '문화 복지'의 관점에서 이야기된다. 즉, 수동적인 대중에게 문화적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 프레임워크는 이러한 접근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활동'과 '실천'은 기관이 무엇을 '제공'하는가에서 시민이 무엇을 '하는가'로 초점의 이동을 요구한다.
다음에 이야기할 의정부의 사례는 이러한 전환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완성된 문화 상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의 문화적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신뢰와 도구를 제공하는 데 집중한다. 따라서 지역문화원이 겪는 위기는 낡은 모델의 위기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은 더 나은 공급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주체성을 촉진하는 최고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많은 주민이 지역 문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지만, 복잡한 행정 절차, 초기 자금 부족, 그리고 '공식적인' 문화는 기관이 주도하는 것이라는 인식의 벽 앞에서 좌절하곤 한다. "시민보다 행정이 우선"이었고 "시민의 목소리가 소외"되었던 의정부의 과거사는 이러한 도전 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장벽을 허물기 위해 의정부 문화도시 사업이 내놓은 해법은 '100만원 실험실'이라는 혁신적인 시민 주도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그램은 문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혁명적인 도구로서 심도 있는 분석의 가치가 있다. 핵심 작동 원리는 저위험-고신뢰 기반의 소액 지원 사업이라는 점이다. 특히 '무정산 원칙'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은 이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혁신이다. 사소한 행정 지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사실상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을 허물고, 행정이 시민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급진적인 선언과도 같다.
이러한 신뢰 기반의 접근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첫째, 행정 중심의 하향식 기획으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성 넘치는 문화 실험들이 도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피어났다. 새로 이사 온 이웃을 위한 '웰컴 패키지' 제작, 세대 간 소통을 위한 댄스 영상 제작, 심지어 반려동물을 위한 콘서트 개최까지, 그야말로 문화적 다양성의 보고가 열린 것이다. 이는 획일적인 대규모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다채로운 삶 자체를 문화의 자원으로 삼는 전환을 의미한다.
둘째, 이 프로그램은 새로운 시민 리더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주부, 청년, 예술가, 은퇴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실험지기'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직접 실현하며 기획자이자 실행가로 성장했다. 이는 풀뿌리에서부터 새로운 시민 리더십의 층위를 두텁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마지막으로, '100만원 실험실'은 의정부라는 도시에 '시도해도 괜찮다'는 문화를 확산시켰다. 작은 실패가 용인되는 환경 속에서 시민들은 주저 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에 옮겼고, 이는 도시 전체의 회복탄력성과 혁신 역량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100만원 실험실'의 진정한 가치는 개별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총체적인 시스템에 있다.
첫째, 이 사업은 도시에서 가장 효율적인 문화 R&D 부서처럼 기능한다. 행정이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추측하는 대신, 시민들의 열정과 관심사,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수백 개의 생생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확보하게 된다.
둘째, '무정산' 원칙은 사회적 자본에 대한 의도된 투자다. 시는 작은 재정적 통제를 포기하는 대신, 시민들의 신뢰와 호의라는 막대한 자산을 얻음으로써 과거 행정 불신의 역사를 역전시킨다.
셋째, 이 프로그램은 시민 참여의 명확한 성장 경로를 제시한다. '100만원 실험실'에서 성공적으로 아이디어를 구현한 시민은 더 큰 규모의 지원을 받는 '문화도시 실험실'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시민의 작은 아이디어가 도시를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가진 이니셔티브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인재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것과 같다. 이 모델은 '주민 중심' 문화를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이 '스스로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여기서 문화원과 같은 문화기관의 역할은 콘텐츠 생산자에서 시스템 설계자로 전환된다.
'100만원 실험실'이 개인의 행동을 촉진한다면, 문화자치의 핵심 과제는 이 에너지를 제도적 변화로 연결하는 것이다. 시민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조례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의정부 사례는 이에 대한 다층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첫 번째 단계는 '문화자치 정책마켓'을 통해 정책 제안 과정을 놀이처럼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이 혁신적인 행사는 정책 수립 과정을 시민들이 아이디어의 '판매자'가 되고, 시의원과 공무원들이 '구매자'가 되는 활기찬 시장으로 재구성한다. 시민들은 자신의 정책 아이디어를 부스에서 홍보하고, 경매에 부치며, 우수 정책으로 시상받기도 한다. 이 과정은 딱딱하고 위압적으로 느껴졌던 거버넌스의 문턱을 낮추고, 정책을 시민의 삶과 직결된 친숙한 대상으로 만든다. 이는 단순한 의견 수렴을 넘어, 시민과 정책 결정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두고 협상하고 소통하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두 번째 단계는 이러한 파트너십을 공식적이고 지속 가능한 구조로 만드는 것이다. 의정부 문화도시 거버넌스는 세 개의 핵심 축으로 구성된 견고한 협력 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시민협의체: 다양한 배경의 주민, 예술가, 활동가로 구성되어 시민 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들은 의제를 발굴하고 제안하는 원천이다.
행정협의체: 10개 부서의 공무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민의 아이디어가 실제 행정 시스템 안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부서 간 협력을 조율하고 실행 가능성을 검토한다.
지원협의체: 의정부문화원, 문화재단, 도서관 등 17개 이상의 중간지원조직 네트워크로, 프로젝트 실행에 필요한 전문성, 자원, 현장 지원을 제공한다.
이 삼각 거버넌스 구조는 '정책마켓'이나 '100만원 실험실'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도록 보장한다. 시민의 제안은 시민협의체를 통해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행정협의체에서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며, 지원협의체의 자원을 통해 구체적인 사업으로 실행되는 '정책화 경로'를 갖게 된다. 이는 시민 참여가 구체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의정부문화원은 정체성 위기 앞에서 중대한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다른 기관들과 유사한 사업으로 경쟁하는 대신, '지역학'과 '지역 아카이브'라는 한 가지 핵심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갖춘 기관이 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장 잘해야 할 것 하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었다.
중요한 점은 문화원이 이러한 새로운 사명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 아니라,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에 걸쳐 시민들과 함께 차근차근 그 토대를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시민 파트너 만들기'에서 시작되었다. 문화원은 '시민 마을기획자'와 '시민 마을기록가(채록활동가)' 양성 과정을 통해 100명에 달하는 숙련된 공동체 연구자 그룹을 체계적으로 육성했다. 이렇게 양성된 시민들은 단순한 교육 수혜자에 머무르지 않고, '권역지(마을지) 발간 사업', '찾아가는 아카이브' 등 지역사 연구 프로젝트의 핵심 동력이 되어 자신들의 역사를 스스로 조사하고 기록하는 주체로 활동했다.
이러한 노력의 정점은 '의정부기억저장소' 설립 프로젝트에서 나타난다. 이 사업의 가장 큰 상징성은 그 장소에 있다. 기억저장소가 들어선 '향군클럽'은 과거 미군 전용 클럽으로 사용되던 공간이다. 미군 주둔이라는 의정부의 복합적인 근현대사와 깊이 연결된 이 공간을 시민이 함께 만들고 운영하는 아카이브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행위 자체가 도시의 서사를 되찾아오는 강력한 선언이다.
'의정부기억저장소'는 의정부 문화도시 전략의 모든 요소가 집약된 궁극적인 파트너십 모델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 핵심 주체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의정부문화원: 기관의 리더십과 전문적인 아카이빙 기술, 영구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문화도시 사업: 전략적 프레임워크와 재원을 제공하고, 도시 전체의 비전과 연결한다.
의정부시 행정: 건물을 매입하여 물리적 자산을 제공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
시민: 전문 교육을 받은 시민기록가들이 직접 이야기를 수집하고 전시를 기획하며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를 통해 공식적인 역사가 아닌, 공동체의 살아있는 기억이 담긴 공간을 만든다.
이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문화자치에 있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첫째, 진정한 문화자치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공동의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억저장소는 바로 이 정체성의 토대를 제공한다.
둘째, 시민을 기록의 주체로 세움으로써, 이 프로젝트는 서사를 만드는 권력의 이동을 보여준다. 공식적이고 단일한 '역사(history)'보다 개인적이고 다층적인 '기억(memory)'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 민주주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셋째, 이 전략적 집중은 문화원에 다른 기관이 대체할 수 없는, 독자적이고 항구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문화원은 공동체의 이야기를 엮는 직조자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의 모든 문화 실험에 장소의 의미를 부여하는 필수적인 파트너가 된다. 이것이 바로 문화원이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고 지역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거듭나는 길이다.
의정부의 사례가 보여준 문화자치로의 여정은 명확한 경로를 따른다. 그것은 '100만원 실험실'을 통해 개인 창작자의 잠재력을 깨우는 것에서 시작하여, '정책마켓'과 삼각 거버넌스를 통해 이들을 제도적 대화의 장으로 연결하고, 마지막으로 '의정부기억저장소'를 통해 이들의 모든 활동을 공동으로 창조한 정체성 위에 단단히 뿌리내리게 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의정부문화원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역할 모델이 드러난다. 그것은 단순히 문화를 제공하는 공급자가 아닌, '공동체 직조자(Community Weaver)'로서의 역할이다. 이 새로운 역할은 세 가지 핵심 기능으로 정의할 수 있다.
사람을 잇는 역할: 시민 창작자들 사이의 '느슨한 연대'를 촉진하고 강화하는 플랫폼이 된다.
아이디어를 행정과 잇는 역할: 풀뿌리 아이디어가 공식적인 거버넌스 구조와 만나 정책으로 구체화될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다.
현재를 과거와 잇는 역할: 공동체의 기억을 현재의 활동 속에 엮어 넣어 깊이와 의미, 그리고 공동의 토대를 제공한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에우다이모니아'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공동체 직조자'라는 지역문화원의 새로운 모델은 '피어나는 지역'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 실천 그 자체다. 이는 만개하는 삶이란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새로운 시대, 지역문화원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바로 권한을 부여받은 시민이며, 지역문화원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시민 스스로 '피어나는 공동체'라는 아름다운 직물을 짤 수 있는 튼튼한 베틀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