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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사업>
_ 춘천문화재단 기초거점 사업을 중심으로 사람이 사람을 부른다
강정지 | 춘천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팀장
도시 가면을 벗기는 ‘동네지식인’

도시는 무수히 많은 가면을 쓰고 있다. 많게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동일한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개개인의 삶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고 그 누군가의 삶과도 결코 같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생각과 가치관이 반대 성향의 이에게는 몹시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그 도시 환경이 ‘한 집 건너면 모두 아는’ 낡고 복잡한 관계 속에 있다면 가면 속에 자리한 개인들의 진짜 얼굴은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
내가 사랑하는 도시, 춘천도 그렇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수부도시, 물 환경 규제 지역, 고령화사회 진입도시 등 침체된 도시 환경과 삶을 둘러싼 난제에도 불구하고 살기 좋은 도시, ‘낭만도시’라는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인구 28만의 작은 지역사회에서 감추고 싶은 어두운 이야기, 특히 마음 속 두려움, 열등감, 불쾌감 그리고 타인을 향해 쏟아지는 증오는 해결의 기미 없이 관망되어왔다.
‘관망’이란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한 발 물러나서 돌아가는 형편을 지켜보다’라는 뜻을 지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과 상관없는 문제해결 상황이 오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한 발’ 물러나 있기를 원한다. 당사자가 아니면서 문제해결에 나설 경우 때로는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섣불리 나서기를 꺼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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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의에 맞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도시의 의인이자 오지라퍼로 언급되는 익명의 그들, 나와 이웃을 위해 단소리,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우리 삶에 당면한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품격(格) 높은 시민 주체들을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호명해야 할까?
춘천은 고민 끝에 춘천문화재단 문화매거진 《pot》 편집장인 고영직 문학평론가가 주창한 ‘동네지식인’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했다. ‘동네’가 삶터 그 자체를 의미하고, ‘지식인’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이들이야말로 문화도시의 주역인 시민 리더로서 자격이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과 성찰 속에서 2020년 법정 문화도시에 선정된 춘천은 우리 동네 품격(品格)을 잇는 잔소리꾼을 발견하는 사업으로 ‘동네지식인’이라고 사업을 명명하고 참여 대상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기획하며 처음 든 생각은 ‘좁은 지역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쓴소리를 자처하는 시민 주체가 과연 몇이나 존재할까?’와, ‘전문적 지식체계 없이 삶의 지혜와 경험만으로 모두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까?’와 같은 일종의 불안과 의심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동네지식인 활동이 시작되자 그것은 단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춘천에서 발굴한 16명의 동네지식인들은 스스로 도시 문제를 제안하였고, 약 10회 이상의 시민 공론장을 역동적으로 펼쳐냈으며 그 대략적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바짝 다가온 초고령화사회, 매년 은퇴자가 늘어나는 이유 (고령화 사회 대응)
- 하루 95%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 (도시 교통문제)
- 정체된 구도심의 활성화 방안 (주거여건 개선)
- 외출은 줄고 아픈 사람은 늘어가는 일상 (코로나19 대응)
- 춘천에 살아야만 시민인가? (관계인구 확장)
- 춘천의 아름다운 자연생태계, 현명하게 활용할 수 없을까? (자연생태계 활용과 도시 성장 등)

동네지식인은 도시의 가면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문제를 바깥으로 꺼내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만 불편하고, 혹은 나만 고민하는 문제인 줄 알았는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만날 수 있어 참으로 의미 있네요’, 혹은 ‘춘천이 춘천다워지는데 시민이 의견을 제안하고 또 다른 시민이 그 의견에 힘을 보탤 수 있어 공론장이 더욱더 크게 퍼져나가길 바랍니다’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삶터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단단해지고 영글어가는 과정을 맛보았다.
또한 동네지식인의 등장으로 인해 오랫동안 미적 교육·다양성 교육·여가교육으로 이해되어온 문화예술교육이 실제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사회의 성숙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한 계기가 되었다. 그들이 수집한 문제의식과 언어, 해결방안은 향후 문화도시 정책과제로 구체화될 예정이다.

도시 품격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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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춘천이 시민의 문화적 삶을 매개하는 문화예술교육의 역할과 쓸모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2018년 즈음의 일이다. 민선 7기 춘천시 문화예술교육 지원조례 제정을 시작으로 2019년 재단 내 문화예술교육팀 신설, 2020년 문화도시 사업 및 기초 단위 문화예술교육 거점 조성사업(약칭 ‘기초거점’ 사업), 2022년 문화예술교육 전용공간 조성사업(꿈꾸는 예술터) 선정으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지역 문화예술교육 환경 조성에 푸른 신호등이 켜졌다.
춘천은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2019년부터 관내 초등학교 대상으로 정규 교과목을 예술로 재구성한 어린이통합예술교육 ‘우리들은 예술학년’과 함께 동네 문화자원을 매개로 범교과 문화예술교육을 펼치는 ‘예술과 동네 한바퀴’ 등을 운영하며 학교-지역사회를 잇는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2022년에는 강원도교육청과 강원지역 3개 문화도시(춘천-원주-강릉)와 함께 지역 문화격차 해소 관점에서 사업과 문화예술교육 매개인력의 역할을 모색하는 연구 사업을 수행하며 다각화 전략을 추진 중이다.
문화도시와 연계한 시민 문화예술교육은 ‘동네지식인’ 사업을 비롯하여 이 시대의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문화다양성 지원사업 ‘돌아온 봄’, 지역 정주(定住) 예술인이 기획한 문화돌봄 활동 지원사업 ‘필요한 학교’ 등을 추진하며 도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도시로서의 품격을 이어가고 있다.

동네지식인이 여는 ‘필요한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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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누구이고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또한 앞으로 어떠한 자세와 태도로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보통 학교 교사들이 교육계획 구상을 통해 이 시대와 사회가 지향하는 교육적 가치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학교 자체의 경직성이 높아 학문적 성취 외에 삶의 주제와 문제의식 등을 연결하는 배움터 역할로 확장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교육이 학습적 성취를 우위에 둠에 따라 문화예술교육 또한 장르와 기량 교육에 집중된 경향을 보여왔다.
하지만 중앙 정부가 헌법에 규정한 국민 행복추구권 보장 등을 위해 제정한 법률(지역문화진흥법, 문화기본법, 문화예술교육지원법 등)에 따라 최근 문화예술교육 지방이양 정책 등이 활발하게 논의되며 점차 지역 문화예술교육 방향은 무엇을(장르·기량)에서 ‘누가, 누구와 함께, 어떻게 활동에 참여할 것인가’로 전환되고 있다.

춘천이 지향하는 문화예술교육 또한 마찬가지다. 특정 지식과 기량 교육보다는 시민들이 서로 돌볼 줄 알고 살필 줄 아는 역량을 이끌어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앎과 삶을 잇는 문화예술교육이 도시 문화의 새로운 동력이고, 동네지식인은 축적된 문화 에너지를 행동과 실천으로 전환하는 시민 리더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는 삶의 문제는 더 이상 어느 한 국가나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특정한 사건·사고, 문제나 현상이 나와 연관성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어디서나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특히 혐오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 사회에서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어디서나 용감하게 질문하고 문제해결에 나서는 ‘동네지식인’이 필요한 까닭이다. 짐작하건대, 도시 품격을 잇는 동네지식인, 그들과 함께 열게 될 기초 단위 문화예술교육 배움터(기초거점)는 상호 이해와 존중이 빛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학교’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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